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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조직에만 40년…이제는 다른 곳에 ‘공’ 들여야죠”
  •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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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관료·국책은행장·금융지주 회장까지…
수십년 공들인 네트워크로 글로벌 금융인재 양성 힘쓰는 김용환 한국FPSB 회장

지난달 29일 본지와 인터뷰를 한 김용환 한국 FPSB 회장. 그는 금융인으로 산 40년 중에서 요즘이 참 재밌고 좋다고 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나토(NATO). 어느 국제기구가 떠오른다면 오산이다. ‘Not Action Talk Only’의 줄임말이다.

엘리트 금융관료로, 국책은행장 그리고 금융지주 회장으로 꼬박 40년을 보낸 김용환 한국 FPSB(국제공인재무설계사) 회장이 늘 경계하는 태도다. 달리 말해 ‘입 밖으로 꺼낸 말에는 책임진다’는 인생철학이다.

그는 지난해 4월 농협금융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반년 가까이 ‘놀았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한국 FPSB 회장에 선임됐다. 종일 빼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자리가 아닌 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틈만 나면 국내든 외국이든 여행도 다닌다.

“40년간 (금융) 하나에만 집중했더니 다른 걸 못 했잖아요. 이제야 좀 여러가지를 하고 있어요”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한국 FPSB 집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요새 참 재밌게 지낸다는 얘기를 여러번 했다.

▶어쩌다 공무원=김 회장은 스스로 ‘어공’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치하다 정무직 공무원이 된 ‘어쩌다 공무원’이란 원래 뜻과는 다르다. 그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30년 가까이 금융관료로 살았다. 분류상 ‘늘공’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법조인이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야속하게 법대에 떨어지고 경제학과(성균관대)에 들어갔다. 졸업반이던 1979년에 취업준비차 행정고시를 치렀고, 이듬해 합격(23회)했다.

김 회장은 “당시 10ㆍ26사태가 벌어지고 한 달 뒤가 시험이었다. 취소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돌았는데 예정대로 하더라”며 “떨어지면 회사나 다녀야겠다는 마음으로 치렀는데 덜컥 붙었다”고 돌이켰다. 

그는 행시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에 쌍용에 붙어 신입사원 연수까지 받고 있었다.

‘어쩌다’ 봤는데 성적은 엄청났다.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23기 동기생 230여명 가운데 재무부에서 첫 발을 내디딘 이는 김 회장과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 셋 뿐이었다.

첫 부서는 국제금융국. 국내 진출한 외국계 은행들을 상대해야 했다. 외국인들을 상대하면서 개방적인 성향을 자연스럽게 키우게 됐다는 게 김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두 차례 미국에 머물렀다. 특히 1995년부터 3년 가까이 워싱턴DC에 있는 증권관리위원회(SEC)에서 파견근무를 하던 시절은 그의 인생에 결정적 순간이다. 규모는 크지만 합리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미국의 공무원 조직은, 그에게 신세계였다.

“사실 한국 공직사회는 비효율 투성이였어요. 매일 야근하는 건 당연하게 여겼고 주말에도 장관이나 차관이 나오면 그냥 나와서 종일 대기했죠. 우리도 언젠간 바뀌겠거니 했어요”

1998년 미국에서 돌아와 재정경제부 복지생활과장을 맡았다. 여전한 비효율이 눈에 거슬렸다. 열정이 사그라들고 회의감이 번졌다. 사표를 내기로 결심했다. 관(官) 출신 재무담당을 찾던 대기업에서 면접을 보고 두둑한 월급까지 약속받았다. 그의 ‘출구 전략’에 제동을 건 이는 뜻밖에도 아내였다.

“기업에서 월급 엄청 많이 준단다, 거기로 가겠다고 아내에게 했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버럭 화를 내며 ‘고시에 합격 했으면 국장까진 해야지’ 하면서 이혼하겠단 거예요. 그래서 없던 일이 됐죠.”이후 금융감독위원회(금융위원회 전신)에서 대변인과 국장까지 지냈다. 금감위가 금융위와 금감원으로 분리된 2008년 이후엔 국장을 넘어 상임위원(금융위)과 수석부원장(금감원)도 했다. 


▶변신해도 공공기관=아내와 약속했던 ‘국장’을 넘어 차관보급까지 한 후 공직을 그만두나 했다. 그런데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장이 됐다. 민간회사는 아니지만 어찌됐든 최고경영자(CEO)다.

“젊을 땐 가정이 아예 없었어요. 집은 그저 하숙집.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고. 부하 직원들은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 이제 내가 ‘대장’인 이상 야근은 없다고 다짐했죠”

당시 수은엔 일주일에 한 번 5시에 퇴근하는 ‘가정의 날’ 제도가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김 회장은 그걸 다시 되살렸다.

“5시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게 했어요. 직접 시간이 되면 회사를 돌아다니면서 남아있는 직원 없나 살폈죠. 나중엔 부행장이 돌아다니게 했고요. 그렇게까지 했더니 제도가 지켜집디다”

‘아이들 때문에 시끄러워진다’는 이유로 엄두도 못내던 직장 어린이집도 본점 1층에 보란듯이 설치했다.

수은 행장을 마치고 마침내 금융그룹 회장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공적’ 성격이 강한 농협금융지주 회장 자리였다. 2015년 4월 취임 당시 농협금융은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업황이 나빠진 조선ㆍ해운업에 ‘물린’ 부실채권이 막대했다. 부실규모도 문제였지만, 부실을 걸러내지 못하는 관리시스템이 더 심각했다. 김 회장은 ‘쾌도난마’를 택했다. 취임 2년차에 접어들면서 그간 쌓인 부실채권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빅배스(BigBath)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해 경영실적 적자를 감수한 초강수였다. 농협중앙회로 넘어가는 배당금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엄포를 놨다.

“그 해(2016년) 상반기에 2000억원 정도 적자를 냈죠. 중앙회에선 난리났어요. 바로 비상대책위를 꾸려서 월급 반납했고 경비도 20% 이상 줄였습니다. 부장급 이상 직원들도 덩달아 월급을 자진 반납했고요. 이런 자구노력 덕분에 하반기에 바로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어요”

이해 농협금융의 하반기 순익은 3000억원 가량. 결과적으로는 흑자를 내며 농협중앙회에 배당금도 지급됐다. 김 회장은 지금도 이 때의 빅배스 덕분에 농협금융 체질이 바뀌었다고 자부한다.

▶영원한 ‘공직자’=1952년생. 고위공무원도, 행장도 회장도 다 해 봤다. 사심은 없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는 수십년간 쌓아둔 국내외 네트워크를 개인적으로 좀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외국의 금융사와 각국의 유력 인사들을 우리 기업들과 이어주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업을 벌이는 그림이다.

공직 출발이 ‘국제’였다. 수은도 주요 업무 상대가 ‘해외‘에 있다. 농협금융이 처음으로 본격적인 글로벌 진출을 시작한 때도 그가 회장으로 재직할 당시다. 당시 농협금융은 다른 금융지주들보다 한 걸음 늦은 만큼, ‘합작’과 ‘인수’를 기본 방향으로 해외진출을 하기 위한 중장기계획을 세웠다.

“중국의 농협으로 통하는 공소그룹과 사업협력 양해각서를 썼어요. 이를 바탕으로 현지에서 증권, 보험 사업을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미얀마와 캄보디아에선 마이크로파이낸스 회사를 인수했죠.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합작과 인수가 첩경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40년 금융 인생을 바탕으로 정제해 낸 아이디어를 이제야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옮기려 하고 있다. 정부, 국책은행, 공공적 성격의 금융지주에서는 아이디어의 범위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었다.

“글로벌 펀드를 해외에서 조성해서 좋은 곳에 활용하는 사업들을 구상하고 있어요.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싶네요. 그 펀드로 외국에 학교도 조성해서 거기 인재도 키우고 한국어도 가르치는 것도 좋겠고요.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지고 활동하는 후배들도 키워보고 싶어요. 그러면 세월도 잘 가고 할 것 같네요”

FPSB를 맡은 배경에도 ‘글로벌’ ‘금융’ ‘후배양성’이 있다. 과거 김 회장과 함께 일했던 한 금감원 인사는 “후배들의 장점을 끄집어 내서 키우는 스타일”이라며 “밑에 사람들이 기꺼이 따르는 상관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회장, 역시 이번에도 ‘Not Action Talk Only’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각오다.

박준규 기자/nyang@heraldcorp.com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1533390